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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및 철학

‘거절’의 철학 – 우리는 왜 “아니요”라고 말하기 어려운가

by bloggerds247-2 2025.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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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의 철학 – 우리는 왜 “아니요”라고 말하기 어려운가

 

“아니요.” 이 단어는 단 두 음절로 이루어져 있지만, 인간관계 속에서는 때때로 가장 꺼내기 어려운 말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마지막으로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했던 순간을 떠올려 보실 수 있나요? 아마도 많은 분들이 그 기억 속에서 약간의 죄책감이나 미안함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왜 거절을 두려워하며, '거절'은 철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인과의 관계를 윤리의 출발점으로 보았습니다. 그는 타자의 얼굴 앞에서 우리가 갖게 되는 책임감을 강조했습니다. 타자와 마주하는 순간, 우리는 그 존재에 대해 도덕적 감응을 느끼며 ‘예’라고 말하게 되는 근원적인 윤리의식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감응이 항상 옳은 것일까요? 거절은 비윤리적인 행위일까요?

 

사실 거절은 인간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지키기 위한 중요한 철학적 행위입니다. 20세기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인간을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존재”라고 표현하며, 선택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를 규정한다고 보았습니다. 거절이란, 타인의 욕망에 끌려가지 않고 자신의 판단을 따르겠다는 존재 선언일 수 있습니다. 타인의 기대에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삶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삶이 될 수 있으며, 이는 실존적 고통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종종 사회적 평화를 위해 거절을 삼가고, 타인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애씁니다. 특히 한국과 같은 집단주의 문화에서는 '예의'와 '배려'라는 이름 아래 개인의 의사를 억누르는 일이 빈번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배려란 상대방에게 솔직한 태도로 다가가는 것이 아닐까요? 불편한 진실보다는 편안한 거짓이 낫다는 착각은 결국 관계를 더 큰 불신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자유를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보았습니다. 어떤 관계든, 어떤 상황이든 ‘시작’과 ‘끝’을 선택할 수 있어야 인간다운 삶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거절은 어쩌면 어떤 상황에서 빠져나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겠다는 ‘시작’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단호한 “아니요”는 단절이 아닌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여는 말입니다.

 

물론, 무례한 거절과 철학적 거절은 구분되어야 합니다. 철학적 거절은 타인의 존재를 인정한 뒤, 자신과의 관계에서 선을 긋는 성찰적 행동입니다. 이는 무관심이나 회피가 아니라, 나를 지키면서도 상대와의 경계를 존중하는 행위입니다. 즉, 거절은 단순히 “싫다”는 표현이 아니라,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는 지적인 선언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라고 말하는 데 익숙해질수록, “아니요”는 점점 더 무거운 말이 됩니다. 하지만 거절은 결코 부정적인 행위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거절을 통해 나다움을 유지하고, 관계의 진실성을 되살릴 수 있습니다. 때때로 거절은 사랑이며, 자비이며, 책임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철학이 말하는 '진실된 삶'의 한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예’보다 ‘아니요’를 말할 때 더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왜 거절을 두려워하는지, 그 두려움 속에 숨겨진 철학적 의미를 성찰해보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인간관계의 시작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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