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기억을 쌓아갑니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단지 과거의 충실한 재현이 아니라, 매 순간 다시 쓰이는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마치 편집자처럼, 우리는 기억을 선택하고, 재구성하며, 때로는 덧붙이거나 삭제합니다. 그렇다면 이 ‘기억의 편집자’로서의 인간이라는 존재는 과거를 어떻게 다루고 있으며,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 걸까요?
기억은 단순히 저장된 정보가 아니라, 현재의 정체성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습니다. 심리학자들은 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이 때로는 기억을 억제하거나 왜곡하는 경향이 있음을 설명합니다. 이는 단순한 회피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심리적 전략이기도 합니다. 과거를 그대로 마주하는 것이 때로는 현재의 자아를 위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기억을 두 가지로 구분하였습니다. 하나는 과거의 이미지로서의 ‘순수 기억’, 다른 하나는 현재의 필요에 따라 사용되는 ‘운동 기억’입니다. 우리가 일상 속에서 기억을 떠올리는 방식은 후자에 가깝습니다. 즉, 우리는 필요에 따라 기억을 불러오고, 필요에 따라 다듬습니다. 이때 기억은 과거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기 위한 자원이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기억을 남기고, 어떤 기억을 지우는가에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을 겪은 후 우리는 좋은 기억을 강조하며 아픔을 무디게 하기도 하고, 반대로 배신의 순간만을 반복 재생하여 분노를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이는 개인의 정체성뿐 아니라 도덕적 판단, 세계관 형성에도 깊은 영향을 줍니다.
기억의 편집은 개인만의 일이 아닙니다. 사회도 기억을 편집합니다. 우리는 ‘역사’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정리하고 서술하며, 이를 통해 집단적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때로는 불편한 진실이 지워지고, 누군가는 기억 속에서 지워지기도 합니다. ‘망각’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권력의 작용이 되기도 합니다. 미셸 푸코는 권력이 어떻게 지식과 기억을 조직하는지 분석했으며, 이는 우리가 집단적으로 어떤 과거를 ‘기억하게’ 되는가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불완전하고 가변적인 기억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중요한 것은 ‘기억은 진실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자각하는 일입니다. 기억은 언제나 현재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며, 그것이 인간에게 자유와 창조의 여지를 줍니다. 완전히 객관적인 과거란 존재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기억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고 세계를 해석하는 도구를 만들어갑니다.
결국 인간은 단순한 ‘기억의 저장자’가 아니라, 창조적이고 해석적인 ‘기억의 편집자’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과거를 다시 쓰며, 그 과거를 통해 현재를 살아갑니다. 이 철학적 성찰은 우리가 과거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과거를 통해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합니다.
기억을 편집한다는 것은 그저 왜곡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때로는 생존이고, 때로는 이해이며, 결국은 인간다움의 한 표현일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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