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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및 철학

무언의 동조: 우리는 왜 말없이 따르는가?

by bloggerds247-2 2025.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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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의 동조: 우리는 왜 말없이 따르는가?

 

인간은 본래 독립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우리는 종종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말로 표현하지 않고, 조용히 주변의 흐름에 따라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군가가 말하면 따라 웃고, 다수가 움직이면 함께 움직이며, 때로는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도 침묵 속에 순응하곤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요? 이는 단순히 ‘소극적’이거나 ‘내성적’이어서가 아닙니다. 인문학과 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말없는 동조는 인간 사회에서 깊이 뿌리내린 심리적, 문화적, 존재론적 메커니즘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동조의 심리적 기초

심리학자 솔로몬 아쉬(Solomon Asch)의 실험은 이 주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그는 참가자들에게 명백히 틀린 답을 다수가 말하도록 설정하고, 그 상황에서 개인이 얼마나 동조하는지를 관찰했습니다.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다수가 틀린 답을 말하면, 개인 역시 그것이 틀리다는 것을 알면서도 동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인간은 ‘소속되고자 하는 욕망’과 ‘배제당하지 않으려는 두려움’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타기를 합니다. 결국 다수에 따르는 것이 안전하고, 말없이 동조하는 것이 자신을 보호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침묵과 윤리적 책임

하지만 말없는 동조는 윤리적으로 어떤 함의를 가질까요?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나치 독일의 전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관찰하며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고 항변했지만, 아렌트는 그가 사고하지 않은 책임, 다시 말해 ‘말없이’ 동조한 것 자체가 악의 씨앗이었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침묵이 단지 말하지 않는 상태를 넘어선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지 않는 것은 행동하지 않는 것과 같지 않으며, 때로는 그것이 가장 강력한 동조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윤리적 주체로서 인간은 상황을 판단하고, 그에 따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 요구됩니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어느 한쪽에 기울어지는 무게추가 될 수 있습니다.

철학적 존재로서의 '따름'

존재론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인간은 본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를 구성합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을 바라볼 때 우리가 윤리적 책임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타자 앞에서 말없이 따르는 존재가 되었을까요?

 

이는 곧 현대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도 연결됩니다. 효율성과 속도를 중시하는 현대 시스템은 ‘개별적 판단’보다는 ‘자동적 동조’를 유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직 내에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심지어 가족 내에서도 우리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감추고 다수의 의견에 무언으로 동조합니다. 말하지 않는 것이 미덕처럼 여겨지고, 침묵이 성숙한 태도로 오해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점점 더 사유를 멈추고, 단지 따르는 존재로 변해가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침묵을 깨야 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침묵을 깨고, 동조를 거부해야 할까요? 철학자 미셸 푸코는 진정한 저항은 '말하기'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권력 구조와 사회 통념을 흔드는 사유의 표현이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침묵의 동조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은 자신의 내면에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나는 왜 이 상황에서 말하지 않고 있는가?", "이 동조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내가 침묵함으로써 잃는 것은 무엇이고, 지키는 것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단지 철학적인 사유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실존을 지키기 위한 실천이 될 수 있습니다.


말없는 동조, 그 침묵의 의미

말없는 동조는 인간 사회에서 매우 흔하게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그것이 언제나 바람직하거나 중립적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을 무비판적으로 따르기보다는, 그에 대한 사유와 판단을 통해 진정한 주체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조용한 순응보다 거친 발언과 불편한 질문이 더 큰 진실과 윤리를 담고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이 속한 공동체 속에서, 혹은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조용히 따르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 침묵의 의미를 다시금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말하지 않음으로 인해 우리가 잃는 것 또한 결코 가볍지 않다는 점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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