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하루에 몇 번이나 창밖을 바라보시나요?
아침에 눈을 뜨고 햇빛이 들어오는 창을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하거나, 지하철의 작은 창으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무심코 바라보는 순간. 혹은 사무실에서 잠시 현실의 스트레스에서 도피하고자 창밖 먼 하늘을 바라보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늘 창이라는 경계 안에서 바깥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런데 이 창이라는 것은 단순히 빛과 공기를 들여보내는 물리적 구조물일 뿐일까요? 철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창은 인간의 인식 방식, 자유에 대한 갈망, 그리고 세상과의 관계 맺음을 상징하는 아주 중요한 존재입니다.
창이라는 경계: 안과 밖의 철학
창은 안과 밖을 구분하는 경계입니다.
우리는 창을 통해 바깥세상을 인식하지만, 동시에 그 창은 우리가 직접 그 세계에 닿지 못하게 하는 차단점이 되기도 합니다. 이는 마치 인간의 인식이 세상을 직접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어떤 ‘프레임’이나 ‘매개’를 통해 인식한다는 철학적 관점을 떠올리게 합니다.
칸트는 인간이 세계를 인식할 때, 순수한 감각이 아닌 ‘범주’라는 인식 구조를 통해 해석한다고 말했습니다. 창이라는 물리적 틀이 칸트의 ‘인식의 조건’처럼, 우리는 언제나 필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합니다. 우리가 본다는 것, 안다는 것은 늘 창의 존재를 전제로 한 것이지요.
자유를 향한 시선: 창밖을 바라보는 인간
창밖을 바라본다는 것은 곧 ‘밖으로 나가고 싶은’ 욕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감옥에 갇힌 이들이 창문을 통해 바깥세상을 보며 자유를 갈망하듯, 일상 속에서도 창밖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어쩌면 어떤 억압된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은 무의식적인 충동의 표현일 수 있습니다.
사르트르가 말한 ‘실존적 자유’란 인간이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존재라는 개념입니다. 그런 면에서 창을 바라보며 다른 세계,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는 행위는 실존주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자유의 실천일지도 모릅니다.
내면의 창: 바깥을 보는 동시에 나를 마주하는 행위
흥미롭게도 창밖을 바라보는 행위는 때로 ‘밖’을 본다기보다는 ‘나’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고요한 오후, 창가에 앉아 멍하니 바깥을 응시하는 순간, 우리는 종종 과거를 회상하거나 현재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창은 바깥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마음속 ‘창’을 열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장치가 됩니다.
정신분석학에서 거울이 자기 인식을 위한 상징이라면, 철학에서의 창은 세계 인식과 자기 인식의 이중성을 품고 있습니다. 창이라는 투명하지만 경계적인 존재는 우리로 하여금 ‘밖을 본다’는 행위 속에서 ‘내가 본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디지털 시대의 창: 스크린이라는 새로운 창
오늘날의 창은 유리창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장 자주 마주하는 창은 바로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화면, 즉 디지털 스크린입니다.
우리는 스크린을 통해 세상을 인식하고 타인과 연결되며, 동시에 그 안에서 고립되기도 합니다. 이 창은 물리적 창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우리의 인식을 제한하고 조작할 수 있는 ‘정보의 틀’이 됩니다.
여러분은 지금도 이 ‘디지털 창’을 통해 이 포스트를 보고 계십니다.
스크린이라는 창은 더 넓은 세계를 보여주는 듯하지만, 알고리즘과 필터링된 정보 속에서 우리는 실제보다 왜곡된 세상을 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마치 플라톤의 동굴 속 그림자처럼 말이지요.
결론을 대신한 질문
우리는 창밖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상상하고, 그 너머의 세계를 꿈꾸지만, 정작 그 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 진짜 세계인지, 혹은 우리의 욕망이 투영된 허상이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창은, 물리적이든 디지털이든 간에 결국 우리 존재의 경계를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지금 어떤 창을 통해 세상을 보고 계신가요, 그리고 그 창이 정말 여러분을 ‘밖’으로 데려다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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